서울역사박물관, 「3‧1운동과 천도교 중앙대교당 展」개최

서울역사박물관, 3‧1운동 100주년 기념 특별전에 이어 「3‧1운동과 천도교 중앙대교당
기사입력 2019.03.26 18:16 조회수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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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관장 송인호)에서는 3‧1운동 100주년 기념 특별전에 이어 「3‧1운동과 천도교 중앙대교당」 로비전시를 개막한다. 이번 전시는 3월 26일(화)부터 4월 21일(일)까지 서울역사박물관 1층 로비에서 무료로 개최된다.

 

“천도교가 없었다면 중앙대교당이 없고, 중앙대교당이 없었다면 상해임시정부가 없고, 상해 임시정부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독립도 없었을 것이외다.

        

김구주석은 28일 상오 11시 비서 안미생 여사를 대동하고 부주석 김규식, 선전부장, 엄항섭, 참모장 류동설, 문화부장 김상덕, 국무위원 이시영 선생과 같이 삼각영봉 밑 우이동으로 지난날의 우국동지로 지금은 저세상에 고이 잠들어 있는 의암 손병희선생의 묘지를 찾았다.…

 

전시에서는 3‧1운동을 비롯한 독립운동 자금 동원의 원동력이 되었던 천도교 중앙대교당의 건립 과정을 살펴보고, 일제강점기 조선민중들의 민의를 대변하던 공간이었던 천도교 중앙대교당을 당시의 신문기사와 사진, 설계도면과 모형으로 생생하게 소개한다. 

 

3‧1운동과 천도교 중앙대교당의 건립  천도교단에서는 교당의 신축자금 마련을 위해 매월 거둬들이는 성미(誠米)외에도 각 호당 10원 이상의 성금을 모금하였는데 이를 독립자금으로 의심한 일제는 모금을 금지하고 이미 모인 성금의 반환을 요구했다.

 

 1907년 4월 5일 천도교 부구총회에서 천도교의 재정자립책이 논의되었다. 이 회의에서 전북 익산교구의 오지영이 제안한 “교인 1인당 매 식사 때마다 쌀 한 숟갈씩” 거두는 방안이 채택되었는데 이것이 천도교의 ‘성미제’로 발전하게 되었다.

 

실제로 이 자금은 교당의 건립에도 사용되었지만 3·1운동 및 독립운동 자금으로도 사용되었던 것을 독립운동 재판 기록에서 다수 확인할 수 있다.

 

이정화, 김명준 등 19명에 대한 결정서(1920.4.30.)… 강계, 자성, 후창 3군과 중국 임강현의 천도교무를 통할하는 천도교 대교구장인 피고 김명준은 …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대도주인 박인호를 만났는데 동인들은 피고들을 향하여 “3월 1일 천도교주 손병희가 천도교, 야소교 등의 동지 32명과 같이 조선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독립시위운동의 방법으로 조선독립을 기획하여 체포구금의 몸이 되었다고 말하고 박인호 등은 손병희의 의사를 계속하여 조선독립 시위운동을 행하고 또 그 독립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대표자 또는 위원을 프랑스 파리의 강화회의 및 중국 상해에 있는 동지의 허락으로 파견하기로 기도했으나 손병희 등이 체포됨과 동시에 중앙총부에 보관된 재산도 관헌이 압수하게 되어 독립운동비에 궁핍을 느끼고 있으니 급히 피고 등의 임지(任地)로 돌아가 교구 내 신도로부터 운동비를 모집하고, 또 전부터 천도교 교당건축비로 모집된 돈은 대정 8년(1919) 상반기 성미(誠米) 돈으로 각 기부자에게 반환하기로 되어 있지만 이를 각 기부자에게 반환하지 말고 각 기부자들로 하여금 독립운동비를 제공할 것을 승낙하게 하고 또 각 기부자에게는 교당 건축비를 반환받는 것과 같이 가장하기 위해 영수증을 만들어 두고 새로 모집된 독립운동비와 함께 이를 중앙총부에 보내라‘고 명령함에 따라 …

국가기록원 독립운동판결문 아카이브

 

결국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1918년 12월 1일 교일 기념일에 맞춰 개기식(기공식)을 열고 공사를 시작하여 본래 1920년 4월에 낙성할 계획이었으나 대교당의 설계만 마친 상태에서 3·1운동으로 공사는 중단되었고 1920년 2월에야 재개하여 1921년 4월경 거의 완공되었다 

 

일제강점기 문화운동의 중심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는 천도교 청년회를 중심으로 어린이와 여성, 농민단체의 집회 및 조선물산장려회 등의 각종 사회단체의 집회와 행사가 열려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관과 더불어 조선민중의 민의를 대변하는 공간으로 각광받았다.

 

중앙총부 본관에 있었던 개벽사에서는 민중계몽을 위한 출판문화운동이 활발하였다. 개벽사 발간의『개벽』잡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잡지로서 1920년대 문화‧사상계를 대표하였는데, 일제의 정책에 항거하여 결국 강제폐간되고 말았다.

                         

언론계 일대참극, 개벽에 발행금지한달건너 압수당하던 개벽 잡지이제부터 영원히 발행을 못해7년간 노력도 1장 지령에…지난 8월 1일 총독부 경무당국으로부터 안녕질서를 문란케한다는 이유로 돌연히 그 발행을 금지하였음으로 동지를 최근에발행되어 압수를 당한 8월호 제72호를 최후로 발행할 자유를 영영 잃어버리고 말았다더라.…통권 72호 발행 33호 압수…《동아일보》1926.8.3.  

 

천도교에서는 3‧1운동에 이어 6‧10만세운동의 기획에 적극 가담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교단 간부들은 구속당하고 중앙대교당과 중앙총부 본관은 일제에 의해 압수수색을 당하는 등 핍박을 받았다. 

                                      

기미이후 민족적 중대계획 발각 자동차 부대로 격문 선언서 6~7만장 몰수천도교의 각종단체를 중심으로 제2차 모 중대한 사건을 가장 조직적으로 계획하였다가 사실이 미연에 발각되야 재작 6일 오후 4시 반경부터 시내 종로경찰서에서는 대활동을 개시하야 시내 모처에서 가장 중대한 격문 선언서 오만여 장을 압수하는 동시에 천도교 간부들과 잡지 개벽사원을 외에 각 계통의 관계자를 팔방에서 검거하였는데 사건의 자세한 내용에 대하야는 총독부 당국으로부터 절대로 보도치 못하게 함으로 당국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우선 대략을 보도하노라. …《동아일보》1926.6.8.

 

뿐만 아니라 천도교 중앙총부 본관에 있었던 개벽사(開闢社)는 한국 근대문학의 시작과 발전을 견인하기도 하였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대표적 한국 근대문학 작품이 실려 있는 『개벽』해당 호수도 소개했다.

 

천도교에서는 일찍이 근대적 인쇄시설을 갖추어 대중적으로 유통시키고 있는 자신들의 매체에 문학을 적극 수용함으로써 한국 근대소설의 시작과 발전을 이끌었다. 1906년 《만세보》에서 발표된 이인직의 「혈의 누」는 근대 한국 최초의 신소설로 평가되고 있으며 특히 『개벽』에는 현진건의 「빈처」「운수 좋은 날」, 김소월의「진달래꽃」, 이상화의「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등의 소설이 발표되었다.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실렸던 개벽 70호는 일제의 사전검열 시 압수되어 간행되지 못하기도 했다.

 

전시는 무료로 관람할 수 있으며, 관람 시간은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8시, 토‧일‧공휴일은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이다. 공휴일을 제외한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다. 자세한 정보는 서울역사박물관 홈페이지(www.museum.seoul.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김만석 기자 mskim555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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